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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만주군관학교 다큐,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군 토벌!!
 
폭로닷컴편집국 기사입력  2012/03/15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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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MBC]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 만주의 친일파 3/5
 
2012. 01. 5.에 moonsamo님이 올린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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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 6. 15 경북 선산~ 1979. 10. 26 서울.
제5·6·7·8·9대 대통령.

호는 중수(中樹).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소학교(聞慶小學校)에서 3년간 교직에 몸담았는데, 일본인 시학관(侍學官:지금의 장학사)과 충돌해 스스로 사직했다. 이후 장래를 고민한 끝에 1942년 만주에 있는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에 입학해 2년 과정을 수석으로 수료한 다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했다. 8·15해방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關東軍)에 배속되어 중위로 복무했다.
 
8·15해방 후 1946년 귀국해 국군창설에 참여했고,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를 제2기로 졸업하고 대위로 임관했다. 육군본부 정보국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1949년 여수순천10·19사건을 계기로 군내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혐의를 받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동료장교의 감형운동으로 석방되어 문관으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다가 6·25전쟁 이후 소령으로 복귀,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을 지냈다.
 
소령으로 복귀되는 과정에서 군고위급 장성 사이에 그의 과거 공산주의자와의 관련 사실을 두고 의견 차이가 있어 복귀에 어려움도 있었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육군포병학교장, 제2군단 포병사령관, 제5·7사단장, 제1군 사령부참모장, 제6관구사령관, 육군군수기지사령관, 제1관구사령관,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제2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61년 소장으로 제2군 부사령관에 재직중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하고 도탄에 빠진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겠다"는 등의 혁명공약을 내걸고 청년장교들과 함께 5·16군사정변을 주도했다. 같은 해 7월 군사정변의 최고권력기관으로 입법권·사법권·행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해 2년 7개월간의 군정을 실시했으며,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으로 그때부터 대통령 권한대행도 함께 맡았다. 군정기간 동안 전면적인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정당·사회단체 해체, 용공분자와 깡패 검거 소탕, 댄스홀 및 고급요정 폐쇄,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해 7억 2,000만 환에 이르는 부정축재환수 등을 단행했으며, 국민의식개혁을 위해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해 생활간소화·가족계획·문맹퇴치운동 등을 실시했다.
 
경제시책으로는 농어촌고리채정리와 화폐개혁 등을 단행했으며, 역대정권의 무관심과 무기력 속에 방치된 국토 및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함으로써 그가 내세운 조국근대화의 전기를 마련했다. 당시 이런 개혁정책들은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군정기간 동안 중앙정보부에 의해 '4대의혹사건'(증권파동의 부정, 회전당구 사건,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이 발생했으며, 군정실시 2년 후에 민정이양을 하겠다고 공언해 1963년 '2·27선언'으로 원대복귀를 약속했으나 '4·8조치'로 군정연장을 발표했다가 국민여론에 밀려 철회하는 등 비난을 받기도 했다.
 
군정기간 동안 그의 주장대로 이루지 못한 5·16군사정변의 이념을 민간인 신분으로 실천하고자 1963년 8월 대장으로 예편하고, 1963년에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입당해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정치생활이 시작되었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84.99%의 투표율에 470만 2,642표(유효투표의 46.65%)를 얻어 야당 후보인 윤보선을 15만여 표의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같은 해 12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대통령선거에서 상대후보인 윤보선이 자신의 유세내용 가운데 박정희의 과거 공산주의와의 관련사실을 폭로해 선거에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를 향해 인내와 자중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나가는 근로정신과 소박한 생활인으로 돌아가 항상 성급한 기대의 후면에는 허무와 낙망이 상접(相接)함을 명심하고 착실한 성장을 꾀하는 경제국민이 되어야 하겠다"는 말을 통해 경제성장에 대한 그의 확고하고 단호한 의지를 표명했다.
 
국민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외자확보를 위해 한일협정에 정식 조인하고 1965년 8월 14일 국회의 비준을 거쳐 12월 18일 비준서 교환을 통해 한일간에 국교를 정상화시켰으며, 베트남 전쟁 파병을 단행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매국이라는 비난을, 베트남 전쟁 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팔았다는 비난까지 받았으나, 이를 통해 얻은 경제적 성과는 '보릿고개'라는 고질적 춘궁기로 상징되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게 했으며 이 절대빈곤의 극복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대통령 취임 이후 부존자원이 부족한 한국의 상황에서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기치하에 수출을 독려·촉진하기 위해 매월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직접 주재해 수출 목표를 확인하는 한편, 전세계에 나가 있는 해외공관을 활용해 수출에 주력했다. 제3공화국 기간 동안 수출주도의 고도성장 및 경제개발5개년 계획, 사회간접자본인 산업기지건설 등을 이룩해 경제발전을 위한 기본토대를 구축했다. 이러한 정책 이행을 통해 국민의 정치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던 그는 1967년 7월 제6대 대통령 재선에 이어 1969년 10월 17일 '3선개헌'을 통한 장기집권을 모색했다.
 
미국의 주한미군철수론,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의 국론분열(영남·호남 간의 지역감정 격화), 북한의 남침위협, 근대화에 따른 갈등과 모순 증폭 등의 국내문제와 미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변화, 오일 쇼크의 엄청난 충격 등 국내외적인 정치적·경제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그 명분이었다. 3선개헌에 의해 1971년 7월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침내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해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색인 : 유신체제). 이로써 이른바 '유신시대'라 불리는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는 장기집권의 유신시대에 국민의 의식을 한데 모으기 위해 '새마을운동'이라는 일대 개혁적인 운동을 펼치고자 했다. 1971년에 제창된 새마을운동은 '조국근대화'라는 기치하에 '근면·자조·협동'의 정신을 가지고 국민 개개의 생활 향상과 자유로운 성장은 물론 국가의 발전과 중흥을 이룩하려는 사회혁신운동이라고 내세웠다. 새마을운동은 농촌·도시·학교·공장을 불문하고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이 운동은 민간주도가 아닌 관주도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보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강제성을 띠었기 때문에 부작용도 많았다.
결국 유신시대를 통해 절대빈곤은 해결되었지만 날로 심화되어 가는 상대적 빈부의 격차와 장기집권에 따른 정치적 부작용 및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로 국민의 지지가 약화되자 '긴급조치' 발동으로 정권을 유지해갔다. 그러나 장기집권과 반민주적인 통치를 반대하는 학생·지식인·종교인·정치인의 민주화운동과 고도성장의 경제적인 분배에서 소외당한 근로자·농민·도시빈민의 생존권 요구를 긴급조치로 억압함으로써 국민의 저항에 부딪쳤다.
 
유신시대 동안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10%라는 기록적인 기록을 보였으나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화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갈등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유신시대 초기에는 남북한통일문제를 제기해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를 열기도 했다. 그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1973년 '6·23선언'이라 불리는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대통령 특별성명' 등을 발표해 이를 구체화하고자 했으나 북한측의 태도변화와 국내사정으로 말미암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유신시대 후반기에 접어들어 정권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그나름의 여러 조치를 내렸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 결국 핵심권력층 구성원들의 상호견제를 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그의 용병책은 유신체제에 항거한 1979년 '부마사태'에 직면해 오히려 측근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하는 비극적인 사건을 초래했다.
 
1979년 10월 26일 사석에서 부마사태의 수습책을 둘러싼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의 언쟁 도중 그는 차지철과 함께 김재규에게 권총으로 피격당해 사망했다(→ 색인 : 10·26사태). 저서로는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민족의 저력〉·〈지도자의 길〉·〈국가와 혁명과 나〉·〈민족중흥의 길〉·〈연설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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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3/15 [08:46]  최종편집: ⓒ pokr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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