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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독도 폭파’ 발언의 진실을 찾아서
박근혜캠프와 정광용 ‘박사모’ 회장은 문재인 후보에게 사과해야
 
폭로닷컴편집국 기사입력  2012/08/18 [06:05]
(최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도 폭파' 발언을 두고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 측간에 발언 진위를 놓고 논란이 있었습니다.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인 '구봉이' 님이 자신의 블로그('구봉이의 정치일기')에 이와 관련한 심층분석 글을 올린 후 본지에도 보내와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진실의길 편집자) 

1. 이 글을 쓰게 된 사연 

지난 토요일(11일), 이미 마감일이 지난 원고를 쓰려고 나섰다. 평상시와 같이 컴퓨터를 켜서 뉴스를 살피는데, 박정희의 ‘독도 폭파’ 발언을 둘러싸고 문재인과 박근혜 캠프간 공방이 벌어졌다는 뉴스가 확 들어온다. 

[원문] 박정희의 '독도 폭파' 발언의 진실을 찾아서
http://blog.ohmynews.com/gubong/477832

정치권의 공방은 대개 진실이 가려지지 않은 채 흐지부지 되고 만다. 지난 대선에서의 ‘BBK사건’과 1963년 대선에서의 ‘사상논쟁’이 떠오른다. 그것들은 당시 대선 과정에서 알파와 오메가였다. 이번 대선에서는 ‘박정희유령’이 압도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찍부터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영남대 등이 박근혜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박근혜가 아버지 명예를 회복할 의도로 정치권에 입문했고,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등으로 미화하는 등 그의 아버지의 암(暗)마저 옹호하는데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둘러싼 ‘사상논쟁’은 박정희가 죽고 나서 한참 후에야 진실이 가려졌다. 그리고 ‘BBK사건’은 이명박 퇴임 이후 멀지 않은 시기에 진실이 가려질 것이다. 사후에 진실이 가려지는 것이 되풀이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진실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가려 주지 않았던 탓도 크다. 물론 정치권의 논쟁에 개입하는 데는 위험부담이 따른다. 그러나 필자는 박정희 ‘독도 폭파’ 발언의 진실을 찾아가는 고투를 자청했다.

이 글은 며칠 동안 고투의 개인적 기록이다. 한편 박사모 회장이자 독도전문가인 정광용에게 보여주고 싶어 이글을 썼다. 그가 이번 ‘독도 폭파“ 공방의 핵심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독도 폭파' 발언이 실려있는 미 외교문서) 





 


2. ‘독도폭파’ 공방의 대강

8월 10일 박근혜캠프의 조윤선 대변인은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문재인의 ‘박정희 독도 폭파’ 발언이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는 보도 자료를 내면서 공방은 시작되었다. 문재인은 8월 2일 경북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에서 `대일 5대 역사현안에 대한 문재인의 구상'을 발표하면서 박정희의 ‘독도폭파’ 발언을 언급했었다.

그런데 11일 새벽으로 예정된 올림픽 축구 한일전(3-4위전)을 목전에 둔 시점에, 이명박은 10일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이에 즈음하여 문재인 캠프의 진선미 대변인은 10일 논평을 통해 문재인의 2일자 발언을 다시 전했다. 결국 이명박의 독도방문이 없었다면 이 공방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박근혜가 이명박의 독도방문의 유탄을 맞은 셈이다
.






그 이후 양측의 공방이 오갔다. 언론은 ‘문-박, 독도 공방’식의 지상중계만 했다. 하지만 그 공방은 ‘문재인의 판정승’으로 대충 결말이 났다. 박근혜 측은 이틀 후(12일)에, 영악하게도 논점 이탈을 시도했지만, 10일자 보도자료의 오류를 간접적으로 인정했다(아래 줄친 부분 참조). 

“문재인 후보측이 당시 국내외 외교문서 전체의 내용은 무시한 해, 미국측 특정 문서 한 구절에만 의존해서 박대통령의 독도에 대한 입장을 왜곡하는 것은, 예민한 한일관계를 이용해 국민적인 자존심을 건드려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는 대단히 정략적인 정치공세이다.”

오류는 누구나 범할 수 있다. 솔직하게 자기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 그리 부끄러운 일인가? 박근혜캠프가 간접적으로나마 자기 오류를 인정한 것에 비해, 박사모 회장 정광용은 아직 자기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사모는 주지하듯이 박근혜의 가장 유력한 친위대이다. 정광용은 조윤선의 10일 보도자료가 발표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박사모 홈피에 “(경고)문재인 후보, 3일內 사과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조치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눈에 띄게 게재했다(11일 새벽 0시 14분에 올림).

조윤선의 보도자료가 간단한 데 비해 근거자료까지 제시했고 논조도 과격했다. 그 성명 말미에 첨부된 근거자료들을 통해, 필자는 정광용이 {독도의 진실}이라는 단행본까지 낸 독도전문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광용은 12일에도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공개질의)매국노의 후예가 될 수도 있는 문재인 후보께 묻습니다”라는 성명을 또 올렸다. 그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문재인이 인용한 문구는 ‘허위 또는 위조일 가능성 거의 100%’라고 대담하게 주장했다.

그 근거들은 자세히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수준 이하였다. 한편 정광용의 두 개의 성명 아래에는 ‘대장님 만세’식의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필자는 그 문건과 문구가 ‘허위 또는 위조일 가능성 거의 0%’라는 것을 이 글을 통해 증명할 것이다.






박근혜캠프와 정광용은 문재인에 대해 도리어 사과성명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문건 내용을 보도한 연합뉴스와 유수 언론들에 사과하고, 그 문건을 논문에서 최초(?)로 활용한 연구자 이석우(현 인하대 교수)를 문서 위조범으로 몬 것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캠프 차원에서 유력한 야당 후보를 비판하려면 당연히 치밀한 검증 과정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박근혜 캠프는 상식 이하의 실수를 범했을까? 필자는 그 점이 정말 궁금했다. 문재인이 언급한 내용은 2004년 6월에 <연합뉴스>를 중심으로 주요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것이었다. 네이버와 다음 등 검색 사이트를 통해 ‘독도 폭파’로 뉴스를 검색해보기만 했어도 그런 자충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인데.

박근혜 캠프는 언론 기사들을 검색할 능력있는 사람이 없을까? 그런 무능한 캠프가 유력한 차기 권력 주체라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니다. 아버지 ‘박정희 콤플렉스’ 탓에 이성과 판단력을 상실한 탓일까? 추정컨대, 박근혜캠프의 이번 자충수는 박사모회장 정광용으로부터 시작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박근혜의 친위대장격이며 게다가 독도 관련 책자까지 발간한 독도 전문가인 정광용이, 문재인 발언이 완전 허위라며 강력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캠프는 검증 절차도 거의 없이 보도자료를 냈던 것이리라. 물론 이상의 3가지 이유가 동시에 작용하여 박근혜캠프는 자충수를 범했던 것이리라.

결과적으로 정광용은 독도 전문가라는 그의 위신에 치명적 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의 의도와 충정에도 불구하고, 박근혜와 박사모의 위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필자의 추정이 맞다면 정광용은 쉽게 자기 오류를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처음 성명에서 3일간의 법적 처리시한을 설정했다가 두 번째 성명에서 하루 연장한다고 했다. 그 기한이 이미 지난 것 같은데 그가 문재인 측을 고소했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다.

3) ‘독도 폭파’ 발언자들

‘독도 폭파’라는 말은 196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이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 대해 1996년에 자민련 총재 김종필은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모두 왜곡된 소리들이다. 62년 11월 10일 당시 숙소이던 오쿠라호텔에서 교도통신과 단독회견을 했는데 이것이 조선일보에 인용 게재됐다. 내가 당시 관여했던 것은 청구권문제 하나뿐이다. 독도문제는 회담과는 별도로 이케다 수상이 얘기하다가 먼저 꺼냈다. 자기 땅이라고 하도 우기길래 혈기왕성한 나이고 해서 너희에게 줄 수는 없다는 의미로 ‘폭파해 버릴까’ 했고 그러자 이케다가 더욱 문제가 된다며 웃었던 것이 전부이다.” (조선일보, 1996.3.9)

아무튼 김종필 본인이 인정했으니, 그가 ‘독도폭파’ 발언을 했던 점은 분명하다. 이후 2005년 한일협정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일본측 관계자도 그런 발언을 했다는 것이 추가 확인되었다. 1962년 9월 3일의 한일 예비절충 4차회의에서 이세키 유지로 아시아국장은 ‘사실상에 있어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 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조선 동아 등, 2005.8.27)라고 말했다.

이러한 일본 고위 관리의 발언은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일본은 독도를 지렛대로 삼아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한국에 대해 한일회담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려는 전략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먼저 ‘독도 폭파’ 발언을 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김종필과 이세키 외에도 박정희와 미국도 ‘독도 폭파’발언을 했다. ‘독도 폭파’ 문제에 국한하여 한일회담의 타결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이 문제를 풀어보자. 

1962년 9월 이세키는 ‘독도 폭발’ 발언을 했다. 이어 1962년 10월의 소위 김-오오히라 1차회담(20일, 11월의 2차회담이 아니라)에서 김종필도 ‘독도 폭파’ 발언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미 외교문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문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2인자이자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은 민정이양 과정과 공화당 사전 창당, 한일회담 등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미국은 박정희보다 김종필에 대해 과격한 민족주의자로 평가하고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그를 미국으로 불러들여 기합을 주려 했다. 김종필은 마침내 1962년 장기간(10월 20일-11월 13일)의 외유에 나섰다. 20일 동경에 들러 오오히라 외상과 이케다 수상 등을 만나 교착국면에 처해 있는 한일회담의 돌파구를 열었다. 

그리고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서 러스크 국무장관 등 수많은 요인들을 만나서 민정이양과 한일회담 등의 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김종필은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일본과의 교섭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소상하게 알렸다. 그 중 독도 문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러스크가 ‘독도는 어떤 섬인가’ 묻자 김종필은 ‘갈매기가 똥이나 싸는 장소’라며, ‘나는 일본측에 독도를 폭파시켜버리자고 제안했다’. 러스크도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미 외교문서, 1962.10.29).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종필 자신도 인정했고 미국측 문서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광용은 박정희는 물론 김종필도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강변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김종필은 1962년 10월의 김-오오히라 1차회담시에 ‘독도폭파’ 발언을 했다. 특히 1996년에 미국의 외교문서 중 해당 부분이 공개되면서 확인되었다. 김종필의 해명과 미외교문서가 공개된 시점이 모두 1996년이라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6년 12월 28일 도쿄신문이, 비밀해제된 미 외교문서를 근거로 김종필 ‘독도 발언’을 보도했고, 그것이 29일자 국내 언론에도 소개되었다. 

김종필은 장기간의 미국 체류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와 김-오오히라 2차회담을 진행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김-오오히라 각서(11월 12일)가 작성되었다. 이로써 한일회담은 사실상 타결되었다. 이상의 상황들에서 한일회담 조기 타결을 향한 미국의 적극 개입과 중재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4) 박정희의 ‘독도 폭파’ 발언

이상에서 일본(이세키) 한국(김종필) 미국(러스크)의 ‘독도폭파’ 발언의 주체를 확인했다(러스크는 동의 수준). 그러면 박정희는 과연 그런 발언을 했을까. 이것이 이 글의 1차적 관심 대상이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6월 22일)를 목전에 둔 시점인 5월 16~27일에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했다. 그 때 박정희는 존슨 대통령과 17~18일에 걸쳐 2차례 면담했고 18일 오후 5시(한국시간 19일 오전 6시)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62년 김종필이 만났던 러스크 국무장관과도 만났는데, 그 대화내용이 비망록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독도 폭파’ 발언이 기록된 문건이긴 하지만 진위 논란이 되었던 문제의 미 외교문서이다.

그 외교문서의 존재와 내용이 한국에 널리 알려진 것은 2004년 <연합뉴스>를 통해서였다. <연합뉴스>는 임박한 6월 22일의 한ㆍ일 수교 39주년을 앞두고,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있는 한ㆍ일 수교 관련 문서 1천여 쪽을 검토, 분석해 ①독도 중재 안 ②수교 압력 ③`평화선' 공방 등 3회 특집을 마련했었다. 이 특집은 이전에 공개되지 않은 자료에 근거한 것이라고 했다. 그 기획의 첫 번째인 6월 20일자 <연합뉴스> 기사 중 ‘독도 폭파’ 발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위와 같은 문서의 사진까지 실려 있다. 

“이 비망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수교 협상에서 비록 작은 것이지만 화나게 하는 (irritating problems)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말했다(President Park said he would like to bomb the island out of existence to resolve the problem).”

문재인은 이 기사를 근거로 박정희 ‘독도 폭파’를 거론했을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캠프와 정광용은 이 기사의 존재조차 확인하지 않고 문재인의 주장이 허위사실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앞서 살펴 본대로 위 기사의 존재를 확인하고서야, 박근혜캠프는 논점을 전환하며 한편 꼬리를 내렸다. 이에 비해 정광용은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여전히 고집하고 있다.

그 비망록은 현재 미 외교문서 사이트(http://www.state.gov/www/about_state/history/vol_xxix/zk.html)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Korea의 363호 문건이 그것인데, '편집자 주'(Editorial Note)의 형태로 남아 있다. 원문의 내용을 개략적으로 요약하는 형태이다. 

미 외교문서는 일정시점이 지나면 공개하는데, 일부는 공개하지 않거나 일부분을 가리기도 한다. 이 비망록은 박정희 ‘독도폭파’ 발언과 같은 민감한 부분이 있는 탓에 '편집자 주'의 형태로 공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문서의 상당수가 이런 편집자주의 형태로 실리기도 한다.

그리고 2002년 발간된 이석우의 논문에 인용된 것으로 보건데, 원문은 2002년 이전에 공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정광용은 인터넷에 공개되는 미 외교문서에 ‘독도 폭파’ 내용이 없으니, <연합뉴스> 기사에 등장하는 문건을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사에 문건의 사진까지 함께 실려 있는데도. 
 






필자도 <연합뉴스>의 기사에 약간의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정광용처럼 문서 위조를 의심했던 것은 아니고 오독과 오역을 의심했다. 그래서 원본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입수가 쉽지 않았다(결국 입수했지만). 그러던 차에 박사모 싸이트에서 원본은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것을 의외로 확보할 수 있었다.

박사모 사이트는 위 비망록이 유일하게 인용된 논문이라면서, 이석우의 2002년 발표 논문(PDF)을 찾아내었다. 그 논문 제목과 해당 지면을 캡쳐하면 다음과 같다. 정광용과 박사모 회원들의 열정에 감탄했다. 그리고 이 귀한 자료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어 개인적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위 그림의 본문과 각주에서 보듯이, <연합뉴스>에서 살펴본 비망록 내용의 상당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독도 폭파’ 부분의 <연합뉴스> 기사가 오독 오역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표시한 부분에서 곧장 확인할 수 있었다. 정광용과 박사모 일부는 결과적으로 <연합뉴스> 작성자와 이 논문의 필자(이석우 현 인하대교수)를 문서위조범으로 몰고 있는 셈이다.

박정희의 방미시 국내 언론 보도에서 ‘독도 폭파’ 내용은 물론 비판적인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1961년 박정희 방미시 리영희 같은 기자는 당시에 없었다. 쿠데타 직후인 1961년 11월, 박정희가 방미했을 적에 리영희는 수행기자였다. 그는 ‘한일회담 재개’ ‘베트남전쟁에 대한 한국 협력’ 등의 은밀한 내용을 특종 보도했다. 그 보복으로 리영희는 미국 현지에서 권력자로부터 협박 받았고 귀국조치 당했다. 방미외교 성공 축하연에도 수행기자 중 리영희만 초대받지 못했다고 한다.

1965년 방미회담에서 한일회담, 월남파병 등 현안들에 대해 많은 합의가 있었다. 월남파병 등 미국의 주요한 요구들을 한국이 받아들였다. 쿠데타 초기의 껄끄러운 한미관계도 호전되었다. 한미관계의 호전과 정권을 위협했던 한일회담 반대 공세를 진압하면서, 박정희는 통치에 자신감을 가졌다.

그즈음 박정희는 야당은 물론 언론, 교수, 대학생 등 지식인에 대한 멸시와 탄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쿠데타라는 절차적 하자와 ‘무식한 군인’ 집권 이미지를 완화하기 위해, 지식인들을 적극 활용하던 연출마저 이후부터 소홀히 했다. 

5.독도는 뜨거운 감자

현대사 연구에서 미 외교문서가 중시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국내 기록은 부실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보존되지 않았다. 그러나 미 외교문서에 실려 있다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정보원의 신뢰도와 통역상의 오류 가능성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리고 ‘독도 폭파’를 발설했다고 해서 독도수호 의지가 반드시 결여되었다고 단언할 수 없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교적 수사는 본의와 별개로 존립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독도 폭파’ 발언이 사실이고 또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이명박의 ‘기다려달라’라는 발언도 사실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하에서 그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한일회담은 한미일 3국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었음은 상식이다. 쿠데타정권은 절차적 정당성이 없었다. 만연한 실업과 절대적 빈곤의 개선을 통해 정당성을 보완해야 했다. 그런 차원에서 미국에 알리지도 않은 채, 1962년 6월 10일 화폐개혁을 단행하는 모험을 시도했다.

하지만 국내 자본은 보잘 것이 없었고 오히려 미국의 분노만 샀다. 그런 상황에서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적극 추진되었다.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원활히 도입되고, 종자돈(청구권자금)이라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굴욕과 모험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한편, 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성장하면서 한국으로의 진출이 필요했다. 미국은 한미일 반공동맹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국교 비정상화와 적대적 관계는 걸림돌이었다. 가장 곤란한 걸림돌은 과거사와 독도문제였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 없다. 특히 영토문제인 독도문제는 합리적 해결이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독도문제를 원만하게 조정하려 중간에서 애썼다. 앞서 살펴본 1965년 5월의 비망록에서 러스크가 박정희에게 ‘한일 공동 등대’ 따위의 중재안을 제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러스크는 독도 문제에 대해 박정희에게 압박을 가했을 것이고, 이에 박정희는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고 대응했을 것이다.

결국 김종필과 박정희는 더 크고 중요한 대의(국교정상화, 경제발전, 미일한 반공동맹)를 추구하는데 독도가 걸림돌로 존재하는 것을 못견뎌했다. 그렇다고 그들도 독도를 포기할 수 없었다. 독도문제는 정권을 붕괴시킬 위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종필과 박정희에게 독도는 뜨거운 감자였다. 한미일 모두에게 독도는 뜨거운 감자였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잃어버린 10년’이라며 모든 차원에서 역행이 일어났다. 10년 전이 아니라 수십년 전으로 되돌아간 부분도 적지 않다. 이명박 정권은 노무현의 '균형자론'에서 정반대로 나아갔다. 최근에는 일본과 군사정보협정을 은밀히 추진하기도 했다. 강자에게 굴종하고 약자에게 군림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있는, 그리고 '뼛속까지 친일.친미'라는 이명박이 독도문제에 대해 ‘지금은 곤란하니 기다려 달라’(2008년 <요미우리> 보도)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런데 한일간 3-4위 올림픽 축구 경기를 앞둔 날, 이명박은 독도를 전격 방문했다. 이미 오래전에 독도 방문 일정이 잡혀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타이밍이 절묘했다. 그 후 그는 초강경 대일 발언을 연일 쏟아내고 있다. ‘기다려달라’에서 ‘이제 더 이상 못 기다리겠다’로 급격하게 전환했다. 1964년 6.3운동의 주역 ‘대학생 이명박’의 환생을 보는 듯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독도는 뜨거운 감자다. 그런데 이명박은 그 뜨거운 감자를 한입에 덥썩 물었다. 그것도 임기 종료 수개월을 앞둔 지점에서 말이다. ‘독도를 처음 방문한 애국자 대통령’이라는 임기중 공적 쌓기일까? 

이명박의 독도방문은 한편 한미일 신냉전구도 구축 시도에 브레이크로 작용하리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독도문제가 첨예화된다면 한일간 협조는 존립할 여지가 좁아지고 한미일 공조 역시 어렵다. 독도방문을 미국에 사전에 알렸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미 당국자의 반대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명박 본인은 물론 우리 공동체 전체의 운명에 불길한 기운이 드리우게 될까 두렵다. 이미 한일 양측에서 독도를 둘러싼 켐페인이 경쟁적으로 연출되고 있다.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재무장 등의 우경화 추세에 기름을 붓고 있다. 그것은 또한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평화체제를 위협하게 될 것이다.

또한 위에서 살펴보았던 ‘독도 폭파’ 공방의 박근혜캠프의 자충수도 결국 이명박의 독도 방문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이명박의 ‘심오한 뜻’을 필자가 헤아리지 못했기를 바랄 뿐.

6) 자료 해제 

원고를 넘겨야 하는 마지막 시점에 우여곡절 끝에 문서의 원본을 입수했다. 찾고 보니 문건이 달랑 1장 짜리다. 앞서 제시한 <연합뉴스>(2004.6.20)에 실린 사진 그대로이고, 이석우 논문(2002)에서 인용된 것이 거의 전부다. 비망록 형태지만 대화체로 기록되지 않고, 박정희와 러스크의 대화가 재정리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해제할 만한 사항이 없다. 그러나 문서 위조를 주장하고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 있어서, 정확한 문서번호와 폴더 및 박스의 사진을 구태여 제시한다.

<문서번호>

"Memorandum of Conversation: The Seretary and President Park Chung hee", May 18, 1965, POL JAPAN - KOR S, Subject-Numeric Files 1964-1966, RG59 

같은 문서가 또 다른 곳에도 존재한다.

"memorandum of Conversation: The Seretary and President Park Chung hee", May 18, 1965, POL1 ROK-JAPAN, box3, Bureau of Far Eastern Affairs, Office of the country Director for Korea, records relating to Korea 1952-66(lot 66D503), RG 59.









/진실의길http://poweroftruth.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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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8/18 [06:05]  최종편집: ⓒ 폭로닷컴
 
신의도6형제소금밭(영농조합법인) - sixbrothersalt.kr/
제품명: K-ACE salt *신의도6형제소금밭, 대한민국 해양수산부 최초(제1호) 우수천일염 인증* -미국위생협회(NSF) 인증 필터 장착 해수 정수장치 사용. -염전 주변 반경 500m 이내 농경지 등 유해 오염원 없음.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신의도의 친환경시설에서 생산. -해양수산부 소금산업진흥법에 따른 엄격한 기준 충족. -친환경 자기타일과 황토판 등에서 생산, 소금 정밀분석 기준치 통과. -KBS 인간극장, KBS 1박2일, KBS 6시내고향, KBS 아침마당, SBS 동상이몽.생생정보, MBC 뉴스데스크 출연 *주문상담 전화: 061-271-6793,275-6778/010-6640-6778/010-6237-1004/010-9478-7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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